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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신륵사는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습니다. 신륵사의 창건 전설과 나옹화상, 다층전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륵사 창건 전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서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그 연못에 살고 있던 9마리 용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원효대사는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들이니 9마리의 용이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륵사에는 9마리 용을 기억하는 구룡루라는 누각이 있습니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도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이라는 바위 부근에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 사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합하였다하여 신력의 신과 제압의 뜻인 룩을 합쳐 신륵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처럼 용과 관련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속에 비보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옹화상과 신륵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는 나옹화상이 지은 청산가로 유명합니다. 나옹화상은 본명은 혜근, 호는 나옹, 강월헌이며 이름은 원혜로 고려말 불교계의 명승이자 고승으로 왕사를 지냈습니다. 나옹화상은 1344년에 회암사에서 수도하고, 1347년 중국으로 가서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으로부터 불법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1365년 회암사의 주지가 된 이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신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문헌에 나오지 않으나 고려말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열반에 드신 후에 큰 규모의 사찰로 명성을 얻은 사실이 <고려사>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원래 나옹화상은 양주의 회암사에 있었는데 1376년 이 절의 중창 낙성식에 너무 많은 시도가 그의 명성을 듣고 몰려드는 바람에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나옹화상의 명성에 위협을 느낀 왕은 밀양의 영원사로 이주하라는 왕명이 내렸는데 가는 도중 신륵사에 이르러 병으로 입적하게 되었습니다. 문도들은 신륵사에서 다비식을 하고 석종 부도를 조성하여 그의 덕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신륵사는 이를 계기로 많은 건물이 크게 중수되어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이와 같은 사세를 기반으로 고려불교를 개혁하고 중흥하는 중심도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신륵사에는 오늘날까지 나옹화상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나옹화상의 사리를 수습하여 거둔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과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목은 이색이 비문을 쓴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입니다. 그 외에도 나옹화상, 나옹화상의 스승과 제자였던 지공화상, 무학대사의 영정이 조사당(보물 제180호)에 봉안되어 있고, 그를 추모하여 후세에 그의 당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강월헌이 강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다층 전탑

    보통의 탑은 법당 앞에 서있지만 신륵사다층전탑은 강변에 자리 잡고 있어 전통적인 탑의 배치형식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경내에서 떨어진 곳에 세운 다층전탑은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으로 보물 제226로 지정되었습니다. 높이 9.4m,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해 7단의 층단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들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탑신부를 구성하는 벽돌의 표면에는 구슬띠 장식을 한 반원형 무늬 속으로 꽃무늬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탑신의 폭은 층층마다 줄어들고 지붕의 너비도 매우 적었습니다. 이 탑은 영조 2년(1726년)에 수리를 한 사실이 탑 북편에 서 있는 비석에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수리가 잘못된 탓인지 기단이 교란되고 탑신부의 층단도 모호한 곳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탑을 구성한 벽돌이 무늬가 수려하고 탑신의 지붕형태와 상륜부의 모습이 생소하여 이국적인 조형양식을 받아들인 느낌이 듭니다. 벽돌로 쌓은 전탑이 있어 고려 때부터 신륵사를 벽 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신륵사는 수많은 문화재만큼이나 사찰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품고 있어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여주시에서는 신륵사에 문화광관해설사를 배치해 방문객 편의를 돕고 있으므로 여주시 종합관광안내소에 전화상담 후 일정을 조율하여 방문하면 좋습니다.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 지 천년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주 8경 중 제1 경이 신륵사이고, CNN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가 봐야 할 아름다운 50곳' 중의 한 곳으로 선정된 곳도 신륵사입니다.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를 들으면 일몰을 감상한다면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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